제목: 법정 다툼으로 번지는 세상, 미술관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미술관 가는 길에 즐겨 듣는 라디오가 있는데, 요즘은 전시 이야기보다 법정 뉴스가 더 자주 흘러나온다. 처음엔 그냥 흘려들었다. 출근길에 듣는 라디오는 늘 그렇듯 날씨와 교통 정보로 시작하고, 간간이 문화 소식이 섞여 나오는데 요즘은 그 자리를 판결 소식이 채우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증거’, ‘항소’, ‘상고’ 같은 단어가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평소 서울시립미술관 작품들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에만 골몰하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법 이야기를 찾아 읽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신기하다.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작품들도 결국 해석과 맥락의 싸움인데, 법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실 이 깨달음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쌓여온 것이기도 하다. 전시 도록을 만들면서 작품 하나에 얽힌 편지, 영수증, 인터뷰 메모를 모으다 보면, 같은 사건을 두고도 남긴 기록마다 미묘하게 다른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매번 확인하게 된다. 기록을 모으는 일은 곧 ‘무엇이 사실인가’를 다시 묻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는 관련 기사를 찾아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했다.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법원의 판단이 진술의 신빙성을 두고 엇갈리고, 그 결과에 불복해 다시 법정으로 향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처음엔 ‘또 정치 뉴스겠지’ 싶었는데, 읽다 보니 꽤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다. 결정적 증거라고 불리는 것들이 정작 판결문에서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다. 미술관에서 도슨트 설명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같은 작품도 누가 어떤 맥락에서 설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는 것. 법정도 결국 그런 곳인가 보다 싶었다. 물론 나는 법 전문가가 아니라 그저 뉴스를 곱씹는 직장인일 뿐이지만, 이 과정을 지켜보며 ‘판단’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판결문을 읽다 보면 ‘합리적 의심’이라든가 ‘증명의 정도’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 말들이 사실은 미술 비평에서 쓰는 ‘해석의 여지’라는 개념과 꽤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얼마나 많은 맥락을 검토했는지가 관건이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주변에서 종종 묻는다.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이냐고. 그런데 나는 이게 꼭 남의 일만은 아니라고 느낀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크고 작은 결정들도 결국 증거와 해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니까. 교통사고나 음주운전처럼 누군가에게는 갑작스레 찾아오는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 놓이면 감정보다는 차분한 절차와 근거가 중요해진다. 주변에서 그런 일을 겪은 지인을 보면, 처음엔 당황하다가도 결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하나씩 정리해 나가더라. 막막할 때는 음주운전전문변호사 같은 곳을 참고해 방향을 잡는 것도 방법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다행히 그런 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뉴스를 보며 ‘미리 알아두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실제로 지인이 겪은 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사건의 정황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메모 한 장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였다. 그 메모는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사실의 나열에 가까웠고, 그 덕분에 대화가 훨씬 매끄러워졌다. 결국 절차란 감정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정리된 언어로 옮기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미술관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요즘 특히 눈에 들어오는 건, 세상이 점점 ‘절차’와 ‘기록’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전시회를 기획할 때도 작품 하나하나의 이력과 맥락을 꼼꼼히 남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매번 느낀다. 소장품 대여 기록, 보존 처리 이력, 소장 경위를 담은 문서 한 장이 훗날 전시의 신뢰도를 좌우하기도 한다. 법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언제 무엇을 말했고, 어떤 자료가 남아 있는지가 결국 판단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일까. 화려한 결론보다 그 과정에서 오가는 진술과 증거들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결과만 보면 단순해 보이는 사건도, 들여다보면 수많은 해석의 층이 쌓여 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새로운 게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어떤 작품은 처음 볼 때와 세 번째 볼 때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처음엔 색채에 눈이 갔다가, 다음엔 붓질의 방향이 보이고, 그다음엔 화면 가장자리에 남은 스케치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판결문을 여러 번 읽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한 번 읽을 때는 결론만 보이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면 판단의 근거가 어디서 흔들렸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곁가지로, 기록이 사라졌을 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미술관에서는 유래가 불분명한 작품을 ‘작자 미상’으로 두고, 추정의 근거를 별도로 남긴다.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를 정직하게 기록하는 셈이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 때로는 침묵되거나, 반대로 과장되기도 한다. 증거가 없다는 것과 증거를 찾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이 둘이 뒤섞여 회자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어떤 주장을 접할 때 ‘이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삼았고, 무엇은 말하지 않았는가’를 먼저 살피게 된다. 이 습관은 전시 해설을 준비할 때와 똑같은 방식이라, 두 영역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나의 작은 루틴은, 뉴스를 하나 읽으면 관련 기사나 배경 설명을 한두 개 더 찾아보는 것이다. 예전에는 헤드라인만 훑고 넘겼는데, 이제는 ‘왜 이런 판단이 나왔을까’를 곱씹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관련 보도를 따라가며 전체 그림을 그려보게 된다. 물론 모든 걸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했던 예전의 나와 비교하면 꽤 달라진 셈이다. 여러 기사를 교차로 읽다 보면 같은 사안을 다룬 매체마다 강조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된다. 어떤 곳은 판결의 결과에, 어떤 곳은 그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어느 쪽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고, 오히려 그 차이를 겹쳐 놓아야 입체적인 그림이 나온다. 이건 마치 한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는 것과 비슷하다. 정면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던 재질감이 측면 사진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평점을 매기자면, 이런 시사 이슈를 따라 읽는 일은 ★★★★☆ 정도다. 재미나 흥분과는 거리가 있지만, 세상을 보는 시야를 조금씩 넓혀준다는 점에서 값진 경험이었다. 다만 너무 깊이 파고들면 하루 종일 뉴스만 보게 되니 적당한 선에서 끊는 게 중요하다.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하루 한두 개, 관심 가는 주제만 골라 읽는 정도가 딱 좋겠다. 미술관 관람과 뉴스 읽기를 번갈아 하면 머리가 리셋되는 느낌도 든다. 실제로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며 기사 한 편을 읽으면, 방금 본 작품의 인상과 기사 속 문장이 이상하게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서로 무관한 두 영역이 머릿속에서 잠시 교차하는 순간인데, 그 짧은 교차가 생각을 한 겹 두껍게 만든다고 믿는다.
추천하자면, 요즘처럼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법정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궁금한 분들께 권하고 싶다. 특히 헤드라인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여러 기사를 교차로 읽으며 자신만의 시각을 정리해보고 싶은 분들에게 좋겠다. 나 역시 앞으로도 미술관에서 작품을 정리하듯,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차분히 정리해보려 한다. 화려한 결론보다 그 과정을 음미하는 재미, 요즘 새삼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