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Business

법정 다툼을 보며 미술관 판결문이 떠오른 이유

미술관 다니면서 이상하게도 법원 판결문을 읽는 취미가 생겼다. 전시 하나를 보려면 큐레이터의 해설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아서, 작품의 배경이 된 사회적 사건이나 인물의 행적을 따로 찾아 읽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결문이나 수사 기록 같은 텍스트에 익숙해졌다. 돌이켜보면 시작은 사소했다. 어느 전시장에서 본 설치 작품 하나가 국가 폭력의 기억을 다루고 있었는데, 도록에는 그 사건이 두 줄로 압축돼 있었다. 그 두 줄이 궁금해서 검색을 이어가다 보니 재판 기록까지 닿았고, 그 뒤로는 작품을 보러 간 날이면 자연스레 관련 판

미술관 다니면서 이상하게도 법원 판결문을 읽는 취미가 생겼다. 전시 하나를 보려면 큐레이터의 해설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아서, 작품의 배경이 된 사회적 사건이나 인물의 행적을 따로 찾아 읽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결문이나 수사 기록 같은 텍스트에 익숙해졌다. 돌이켜보면 시작은 사소했다. 어느 전시장에서 본 설치 작품 하나가 국가 폭력의 기억을 다루고 있었는데, 도록에는 그 사건이 두 줄로 압축돼 있었다. 그 두 줄이 궁금해서 검색을 이어가다 보니 재판 기록까지 닿았고, 그 뒤로는 작품을 보러 간 날이면 자연스레 관련 판결문을 함께 펼치게 됐다. 판결문은 미술관 도록보다 훨씬 건조하고, 대신 훨씬 정교하다. 문장 하나가 어떤 사실을 채택하고 어떤 사실을 배척했는지, 그 선택의 이유가 문단마다 촘촘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눈에 최근 몇몇 사건의 재판 흐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증거의 신빙성을 두고 법정에서 설왕설래하는 모습을 보면, 미술관에서 작품의 진위를 판별하는 자리와 묘하게 겹쳐 보인다. 감정위원들이 작품 앞에서 서로 다른 근거를 들고 팽팽히 맞서는 장면과, 증인 신문에서 진술의 앞뒤가 어긋나는 대목을 좇는 검사와 변호사의 모습은 닮은 구석이 많다. 양쪽 모두 결국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라는 같은 질문과 씨름하고 있으니까.

법정 다툼을 보며 미술관 판결문이 떠오른 이유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오세훈 서울시장 관련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가 명태균 씨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한 대목이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재판부는 진술의 일관성과 객관적 정황을 함께 저울질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대목에서 미술관의 인증 절차를 떠올렸다. 작품 하나에 딸린 감정서가 아무리 화려해도, 재료와 제작 기법, 소장 이력이 맞물리지 않으면 신뢰를 얻기 어렵다. 실제로 미술관 학예실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작품의 진위를 두고 두 감정 기관이 정반대 결론을 내렸을 때, 최종 판단을 가른 것은 감정서의 권위가 아니라 안료의 화학 성분과 캔버스의 직조 방식, 그리고 소장 이력에 남은 몇 개의 빈틈이었다고 한다. 결국 사람의 말도 증거도 서로를 받쳐주는 맥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술 하나가 강력하려면 그 진술을 둘러싼 정황들이 조용히 뒤를 받쳐줘야 하고, 반대로 정황이 어긋나면 진술의 무게는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 판단을 둘러싸고 검찰이 상고 뜻을 밝혔다거나, 당사자가 결정적 증거를 다음 심에서 내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좀 다른 결로 다가왔다. 진실을 향한 집요함이라기보다, 결론을 이미 정해두고 거기에 맞는 재료를 찾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미술계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진위 논란이 불거지면 어떤 이들은 작품을 다시 보는 대신, 자신의 기존 주장을 뒷받침할 문헌만 골라 인용한다. 검증이 아니라 확증에 가까운 태도다.

이런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건, 법정도 결국 사람이 만든 공간이라는 점이다. 증거의 무게를 다는 일은 숫자나 규칙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앞에 선 사람의 해석과 경험, 때로는 편견까지 개입한다. 법학에서 말하는 ‘자유심증주의’라는 원칙도 결국 이 지점을 인정하는 제도다. 증거의 증명력을 법률이 미리 정해두지 않고, 판사가 변론 전체의 취지와 경험칙에 비추어 판단하도록 맡긴다는 뜻이니, 그 판단의 공간만큼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문제는 그 공간이 넓은 만큼 판단의 근거를 문장으로 남기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판결문을 읽다 보면 같은 사실관계에서도 재판부마다 강조점이 달라지는 걸 발견하게 되는데, 그 차이를 따라가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하다. 그래서일까. 평소엔 미술관 전시장에서 마주치는 작품의 서사에만 집중하던 내가, 요즘은 판결문의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게 된다. 사회적 쟁점을 다루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 지점은 늘 조심스럽다. 사실관계와 해석을 분리해서 보려는 노력이 없으면, 나 역시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전에 최소 세 가지를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원문에 어떤 표현이 쓰였는지, 그 표현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반대편의 주장은 무엇인지. 이 세 가지를 채우고 나면 글이 재미없어질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남의 결론을 빌려 쓰는 일은 줄어든다. 혹시 이와 비슷한 법적 쟁점을 개인적으로 겪고 있거나 주변에서 마주한 분이라면, 음주운전전문변호사 같은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처럼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것과 실제로 당사자가 되어 대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거리와 당사자의 절박함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골이 있고, 그 골을 메우는 것은 결국 전문성이라는 걸 여러 사건을 지켜보며 절감한다.

여기서 한 가지 곁가지를 덧붙이자면, 미술관의 감정 절차와 법정의 증거 심사가 닮은 점은 절차의 투명성에 대한 요구다. 미술관은 작품을 들일 때 구입 경위와 소장 이력을 문서로 남기고, 감정이 엇갈리면 외부 전문가를 부른다. 법정도 마찬가지로 증거의 수집 경위와 보관 과정을 따지고, 필요하면 감정인을 소환한다. 두 세계 모두 ‘누가 언제 어떻게 이 결론에 도달했는가’를 기록으로 남기려 애쓴다는 점에서, 사실은 꽤 성실한 세계다. 다만 그 성실함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미술관은 도록과 해설로 맥락을 친절히 풀어주지만, 법정의 언어는 여전히 일반인의 눈높이와 거리가 있다. 판결문을 읽는 취미가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흔해진다면, 사회가 공적 판단을 소비하는 방식도 지금보다 성숙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사건들을 지켜보며 내가 매긴 점수는 다섯 점 만점에 세 점 정도다. 재판부가 증거의 신빙성을 따져 판단했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사건이 길어질수록 핵심보다 주변부 공방에 에너지가 쏠리는 모습은 아쉽다. 마치 어떤 전시가 화제성만 앞세우다 정작 작품의 본질은 흐려지는 경우와 비슷하다. 관람객이 작품 대신 포토존 앞에 줄을 서고, 평론은 작품이 아니라 관람객 수를 이야기하는 풍경 말이다. 다만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증거와 진술의 관계를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는 있다고 본다. 판단이 늦어지는 것과 판단의 근거가 두꺼워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후자라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앞으로도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듯, 사회의 주요 판단들을 차분히 관찰하는 습관을 이어가려 한다. 궁금한 사안이 있다면 판결문 원문과 신뢰할 수 있는 보도를 함께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한쪽만 읽으면 쉽게 결론에 도달하지만, 두 쪽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그 사이의 간격이 보인다. 그 간격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내가 이 주제를 대하는 방식이자 이 글을 읽는 분들께 건네는 작은 제안이다.

Leave a Reply